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즈키 간타로 (문단 편집) === 총리 시절 === ||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42.jpg|width=100%]] || || 42대 총리 취임 후 || 우여곡절 끝에 스즈키 간타로가 총리가 되었지만 스즈키 본인도 자신의 총리 취임이 [[패전처리 투수|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스즈키는 [[일본 육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넉 달 동안 꾸준하게 종전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이었는데, 가장 큰 외교적 [[삽질]]이 [[고노에 후미마로]]의 의견을 좇아 [[소련]]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었다. 고노에는 '''소련과 협상해서 소련이 미-일 사이를 중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펴고 있었고 집권 후 예상 외로 전황이 너무 악화된 것을 알게 되자[* 총리가 되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던 이유는 육군이고 해군이고 반대파가 자기들을 공격할 까봐 각자의 불리한 전황을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이다.] 당황한 스즈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소련에 희망을 걸어보게 된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만주 작전|8월 초 일-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남하하면서]] 스즈키의 막연한 기대를 잘라버렸다. 취임 당시 스즈키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취임 당시 77세로, 모든 내각총리 중 가장 최고령이다.'''] 상당히 무기력한 상태였고, 종전한다면 [[원자폭탄]]을 맞기 전에 얼마든지 끝낼 방법도 있었지만 군부와 내각의 국무대신들 간 언쟁으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특히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 참고로 도고 외무대신은 한국계 일본인이다. 그의 조상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 도공.]과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이 서로 격하게 대립했다. 도고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항복하자는 입장이었고 아나미는 [[1억 옥쇄]]론을 주장하며 다 같이 죽자는 입장이었는데, 이 둘을 중재해야 할 총리 스즈키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면서[* 스즈키는 항복 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항복 의사를 발표했다가는 군부 우익한테 [[공개처형]]당할까봐 입 다물고 있었다.] 두 사람 간에 격론이 오고 갔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저네들이 신으로 모신다는 덴노 앞에서조차 욕을 하며 서로 죽여버린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쇼와 덴노]]가 빡쳤을 정도였다. 결국 화가 치밀어오른 도고 외무대신이 7월 말에[* [[구레 군항 공습|구레에 있던 마지막 잔존 함대까지 몽땅 잃어버린 때]]이다.] 선수를 쳤는데, '소수의 민감한 항목을 제외하고'[* 덴노만 유지시켜준다면 식민지 포기고 뭐고 다 받아들이겠다는 '''애매모호한''' 의미였다.]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고 '''멋대로 발표해버렸다.''' [[포츠담 선언]]의 기자회견 시 스즈키 간타로는 1945년 7월 28일에 '''"[[카이로 선언]] 직후 생각에 정부는 중대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아 이를 묵살하며 전쟁의 완결을 추진한다"'''라고 말했는데 다음날 [[아사히 신문]]이 "정부가 묵살"이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 문제의 '''묵살'''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는 '무시'와 '유보' 2가지의 뜻이 있는 지라, 원래는 단순히 시간을 달라는 의미. 즉 '유보'로 이 말을 썼는 데, 이 '''묵살'''이 일본의 국가대표 통신사였던 동맹통신사에 의해 '''ignore it entirely=전면적인 무시'''라고 오역되었고 로이터 통신와 AP통신도 '''reject=거부'''라고 오역되어 보도되었다'''라는 루머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세간에는 흔히 오역 때문에 연합국이 발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발표를 거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속설이다.''' 당장에 저기서 '''전쟁의 완결을 추진'''한다는 부분도 왜곡파가 억지로 중의적으로 의역한 거지, 원문은 아예 '''전쟁을 계속하겠다.'''였다. 이런 전후 문맥을 놓고 볼 때, 저 묵살을 그저 단순히 유보를 뜻하는 걸로 볼 수 있을리가. [[오역/일반사회#s-2|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러는 사이 [[소련]]이 [[만주 작전|선전 포고를 날리고 남하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듣자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의외로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보다 못해 [[쇼와 덴노]]가 나서서 '항복해라'는 수준까지 가게 만들었고, 덴노의 재가가 떨어지자 그제서야 스즈키는 [[항복]]을 결정했다. 이에 일본 육군 소장파들이 길길이 날뛰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쳐댔는데 스즈키는 묵묵하게 항복은 덴노의 결정이라고 밀고 나가서 군부 내부의 항전파 세력을 어느 정도 줄이는 데 기여했다. 스즈키 총리 시기의 마지막은 항복 선언 시 일어난 육군 강경파의 [[궁성사건|반란]]이었다. 8월 14일 총리가 무조건 항복을 결의하자 빡친 육군 강경파가 새벽 사단장을 살해하면서 멋대로 [[도쿄도|도쿄]]를 봉쇄하고 스즈키 총리를 매국노랍시고 암살하기 위해 총리 관저 및 스즈키 사저까지도 습격[* 손녀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스즈키 사저는 스즈키 총리가 없다는 걸 알고 열 받은 장교들이 방화해 전소되었다고 한다.]했으나 스즈키 총리는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이에 강경파들은 총리 암살은 포기하는 대신 덴노의 [[옥음방송|항복 선언]]을 방송하게 될 [[일본방송협회|라디오 방송사]]를 접수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당시 NHK 아나운서 등의 활약 때문에 옥음방송 테이프 탈취에 실패하고 쿠데타군은 이후 출동한 동부군관구 사령관 다나카 대장에 의해 진압되었다.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이틀 뒤 스즈키는 패전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지만 제35대 총리를 지냈던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이 1945년 전범으로 연합군에 체포됨에 따라 동년 12월 그의 후임으로 다시 한 번 추밀원 의장을 맡았으나 이후 공직추방령 대상으로 지정되어 이듬해 6월 의장직을 사임한다. 이후 그는 고향인 노다시에 돌아갔고, 1948년에 자택에서 간암으로 사망한다. 향년 81세. 죽기 직전에 '영원의 평화' 라는 말을 또렷한 목소리로 두 번 되뇌었다고 하며, 화장한 후의 유해에서 2.26 사건 당시에 맞은 총알 3발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정부 관련자들 가운데에서 보기 드물게 살해나 사형당하지 않고 자연사했다. 그리고 [[문민통제|'''"군인은 정치에 관여해선 안 된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정치군인들에게 여러 차례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스즈키의 유품 중 대부분은 고향 노다시의 스즈키 간타로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